검은 테이프만 있으면 모든 건물이 내 캔버스!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첨단 현대미술까지 다 있는 미국의 대표적 미술관인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Brooklyn Museum)에서 처음으로 한국 작가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선보였던 곽선경(Sun K. Kwak, 43)의 이 전시는 ‘280시간 껴안기(Enfolding 280 hours, 7월 5일까지)’라고 이름 붙었다. 전시실에 작품을 설치하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280시간이기 때문이다.
한국 화가 첫 브루클린 미술관 입성 ... 테이프 찢어 붙여 ‘공간 드로잉’
전시실에 들어서면, 실제로는 280시간 보다 훨씬 더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실은 직사각형 모양의 넓은 방이 큰 기둥 네 개를 껴안고 있는 모양이다. 곽선경은 벽과 기둥에 ‘매스킹 테이프(검은 종이 테이프)’ 5km 정도를 격렬하게 찢으며 이어 붙였다. 그래서 마치 거인이 큰 붓을 들고 텅 빈 전시실에 쓱 붓질을 하고 지나간 듯 하다.
하지만 거인이 붓질 한 번으로 쓱 그렸다고 생각 하기에 이 작품은 꽤 계산적이다. 벽에서 나온 붓 자국이 기둥으로 이어지면서 흐름을 만들고, 관객은 이 격렬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곽선경의 스튜디오는 뉴욕 맨하튼 124번가인 할렘에 있다. 지금은 할렘도 개발이 많이 되어 슬럼 이미지가 없어졌지만, 스튜디오를 찾아가며 그래도 조금은 무서웠다. 벽화가 가득 그려진 건물의 가파른 철제 계단을 붙들고 올라가니 좁고 어두운 복도 끝에 곽선경의 작업실이 있었다. 문을 여니 작업실 안은 환하고 넓다. 작업실 책상에는 크기와 색깔이 각기 다른 테이프가 높게 쌓여 있었다. 작가는 맨하튼 다운타운에 살면서 할렘의 이 스튜디오로 매일 출퇴근 한다.
-매일 여기 오는 거 안 무서우세요? 왜 하필 할렘에 작업실을 얻으셨어요?
“제가 보기보다 몸이 약해서, 작업실이 너무 멀리 있으면 힘이 들어서 일을 못해요. 맨하튼 안에서 싸게 구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여기로 오게 됐네요.”
내가 스튜디오에 가겠다고 했을 때 작가는 “테이프만 몇 박스 있어서 볼 것도 없는데……” 라며 망설였다. 사실 스튜디오 자체는 이 작가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는 “자연이 내 스튜디오”라고 했는데, 곽선경에게는 미술관 건물 자체가 그의 스튜디오다. 전시실에 몸으로 직접 설치를 해야 비로소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곽선경 작가(원 안)가 작품을 설치하는 모습
-매스킹 테이프는 원래 뭐에 쓰는 물건인가요? 왜 그 걸 재료로 쓰시나요?
“전 원래 페인팅을 전공했어요. 일반적으로 그림은 예쁜 액자에 둘러 싸여 벽에 걸려 있고, 사람들은 그 걸 몇 초 동안 보고 지나가지요. 하지만 그림과 관객, 작품 재료와 나 사이에 왠지 거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그 거리를 좁힐 방법이 뭘까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재료로 실험을 했어요. 철사도 써보고, 실도 써보고, 캔버스를 톱질해서 잘라 보기도 하고. 그래도 재료와 나의 사이를 좁힐 분명한 것을 찾지 못해서 늘 죽은 것을 그리는 답답한 느낌이었지요. 뭔가 험블(humble)하면서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어느 날 아침 문득 매스킹 테이프가 떠오른 거예요. 매스킹 테이프는 원래 작가들이 색칠을 깨끗하게 하려고 캔버스 위에 붙여서 칠한 뒤 떼어 내서 버리는 재료예요.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생활용품이고, 종이이면서 동시에 테이프라는 사실이 전 좋았어요. 바로 차이나 타운으로 달려가서 까만 매스킹 테이프를 왕창 사왔죠. 그 걸 가지고 당시 쓰던 스튜디오 건물의 비상구 계단 벽에 즉흥적으로 찢어 붙이기 시작했어요. 테이프로 하는 자유로운 드로잉이었어요. 미친 듯이 뜯어 붙이는데, 정말 너무 자유로운 것을 느꼈어요.”
-답답했던 게 확 해결되는 느낌 말인가요?
“마치 손에서 잉크가 나오는 것처럼 자유로웠어요. 이거다, 나와 재료 사이의 거리가 없어졌다. 이렇게 자유롭게 그리면 되겠다, 너무 행복했어요. 뭔가 억눌린 것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게 바로 제 작업이에요.”
“손에서 마치 잉크가 나오는 느낌 ... 살아 움직이는 작품 만들고 싶어”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 설치됐던 작품 ‘Untying Space-Gwangju Biennale’.
검은 매스킹 테이프를 벽에 붙이는 것은 곽선경 작가 자신과 미술 재료 사이의 거리만 좁힌 게 아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관객과 미술작품의 사이를 좁혔다. 사람들은 전시실에 들어오면서부터 이 검은 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전시실을 몇 바퀴 걷고 나니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나라에 온 줄 알고 괴성 지르며 좋아하는 어린 아이도 있다. 곽선경은 “관객들이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는 것, 특히 관객 각자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 전 그 게 너무 좋아요” 했다. 관객이 미술과 한 몸처럼 섞이는 순간이 바로 곽선경이 생각하는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관객이 벽을 따라 몸을 움직이면서 감상하는 모습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검은 옷을 즐겨 입으시는데, 매스킹 테이프 색깔이 검은 것과 관련이 있나요?
“늘 검은 옷을 입는 건 아니고, 작품 설치할 때만 위아래로 다 까맣게 입어요. 내 스스로가 내 작업과 일치감을 느껴야 하니까요.”
매스킹 테이프에 매료된 뒤부터 곽선경은 미국 전역을 뒤져 전시 기회를 주거나 스튜디오를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을 찾아 지원했다. 선정 되면 여행가방에 테이프를 꽉 채워서 싼 항공 티켓이나 버스를 타고 전시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전시하는 그 장소가 곧 그의 스튜디오이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서초사옥 로비에 설치된 ‘생명의 힘(Life Force)’.
-작품이 장소특수적인 성격이 강할 수 밖에 없군요.
“전시하는 장소의 의미와 특성이 제 작품에는 아주 중요해요. 가령 이 브루클린 미술관은 뉴욕의 다양한 인종, 다양한 계층이 와서 즐기는 곳이고, 고대 이집트유물부터 현대 서양미술까지 다양한 시기와 문화가 다 있는 곳이에요. 저는 그런 미술관의 미션에 동참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시실의 벽이 기둥을 껴안는 느낌으로 한 거고, 전시제목에도 껴안는다(enfolding)는 말을 넣은 거예요. 제 작품이 전시실 안에 있는 관객을 껴안도록.”
-수묵화 같은 느낌도 납니다.
“네, 서양과 다른 우리의 ‘선(線)’이라는 개념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동양화가들이 굉장한 집중력을 가지고 군더더기 하나 없이 선 하나를 긋듯, 저 역시 집중해서 선을 붙여요. 제가 설치할 때 귀에 아이팟을 꽂고 하는데, 음악 듣는 게 목적이 아니라, 외부세계와 차단하는 게 주목적이에요.”
-작품을 계속 보고 있으면, 벽에서 선이 쏟아져 나와서 내가 휩쓸려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요? 그런 얘기 들으니 반가워요. 저는 살아 있는 전시를 하고 싶거든요. 박물관에 죽어 놓여있는 듯한 작품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관객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전시 공간은 다 달라지는 거잖아요. 그 게 살아 있는 게 아닐까 해요.”
-이 전시가 인기 있어서 관객과 대화 프로그램도 많은데, 관객들하고 얘기 나누는 건 재미 있으세요?
“저는 관객들의 저마다 다른 느낌을 듣는 것을 좋아해요. 제가 관객에게 주려는 정해진 의도가 없기 때문에 관객이 스스로 어떻게 경험하는 지가 저한테는 중요하거든요.”
-설치할 때는 벽에 먼저 스케치를 한 뒤에 계획에 따라서 테이프를 붙이는 건가요?
“꼭 그렇지는 않고, 선이 나갈 방향만 잡고 흐름과 속도를 즉흥적으로 조절하면서 붙여요. 어차피 추상화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제 작품을 설치, 또는 벽화라고 하지만 저는 ‘공간 드로잉(Space Drawing)’ 또는 ‘조각 드로잉(Sculptural Drawing)’ 이라고 하고 싶어요. 테이프를 쓸 뿐이지 드로잉과 다를 바 없어요. 2차원적인 납작한 테이프가 건축 구조물에 붙어 어디로든 뻗어갈 수 있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전시가 끝나면 이 테이프는 다 뜯어버리나요? 너무 아까울 거 같은데요.
“처음엔 마음이 아팠지만, 오래된 얘기지요. 이젠 괜찮아요. 몇 번 전시를 거치면서 마음 비우는 연습을 하게 됐어요. 이 공간이 다 비워지면 전시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겠지만, 제 전시를 봤던 사람들에게는 기억이 남아있겠지요. 관객들은 더 이상 이 공간을 옛날 공간으로 보지 않고, 여기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한 기억을 가지고 있겠지요. 어찌 보면 그렇게 테이프가 뜯겨 버려지고 관객들에게 기억만 남기는 건,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가버리는 유한한 생명에 대한 얘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 곽 선 경 |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하는 곽선경의 개인전에 대해 뉴욕 현지 언론과 관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뉴욕에서 미술작가로 살아남는 것은 정말 힘겨운데, 곽선경은 비교적 빨리 무대에 들어서고 있다. “여기는 살아남지 않으면 죽는 곳이라는 점에서 도전적이고 짜릿하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한국에서 숙명여대를 졸업한 뒤 1993년에 뉴욕으로 와 NYU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뉴욕에 기반을 두고 작업을 하면서 미국, 유럽, 한국에서 꾸준히 소개됐다. 뉴욕 퀸스 미술관, 드로잉센터, 치 갤러리(CH’I Contemporary Art), 베를린 세계문화의 집, 광주비엔날레(2006년) 등에 전시됐었다. 서울에서는 갤러리 스케이프, 브레인 팩토리 등에서 개인전을 했고, 삼성생명 서초타워 로비에 그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주간조선 2009년 5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