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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읽어내는 매개로서 패션 사진을 다시 보다

 

출퇴근 기차에 매달려 가는 뭄바이 사람들을 담은 김수자의 비디오 ‘뭄바이: 빨래터’ 중 한 장면. 김수자 스튜디오 제공

사진과 비디오 장르만 다루는 사진·비디오 트리엔날레 뉴욕 ICP(International Center for Photography, 국제사진센터)에서 지난 10 1일에 문을 열었다. 미국 내에서 하는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 중 사진·비디오만 다루는 것으로는 유일하다.

3회째를 맞은 이 트리엔날레의 올해 주제는 패션이다. 이 미술관에서 올 한 해 동안 했던 전시의 대주제가 패션이었다. 한 해 동안 패션 사진을 주제로 심포지엄도 곳곳에서 열었다. 그래서 패션 사진이 지금 뉴욕 미술계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화두 중 하나다.

패션을 주제로 하다 보니 이 전시에는 시각예술로서 즐거움을 충분히 주는 화려한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패션이 단지 외형적인 주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사회를 읽어내고 그 사회 사람들 삶을 표현하는 매개가 된다는 것을 이 전시는 잡아내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 의미의 패션 사진에서 한 단계 깊이 들어간 전시로 호평을 받고 있다. 빈스 알레티, 크리스텐 루벤, 크리스토퍼 필립스, 캐롤 스퀴어스 등 큐레이터 여러 명이 팀으로 기획했다.

 

미국 내 유일한 사진 트리엔날레

김수자, 신디 셔먼, 후양 등 참여

 

이를 테면 프랑스 작가 발레리 블린의 사진은 화려하지만 어딘지 멍한 표정의 패션모델들을 보여줘서 만들어진 아름다움에 대해 질문한다. 상하이 출신의 중국 작가 후양의 작품은 단칸방에서 매우 힘겹게 사는 극빈층의 삶을 그들의 옷과 이불 같은 것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수자의 새 작품 뭄바이: 빨래터(2007~2008)’전통적 의미의 패션 사진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이 작품은 인도 뭄바이의 빨래터, 밤거리 풍경, 슬럼가 골목, 사람들이 문에 매달려 가는 출퇴근 기차 등 각 10분짜리 영상 4개가 사방 벽에서 상영되는 작품이다.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 갈수 있을까 싶게 좁고 더러운 슬럼가 골목에는 너절하지만 빛깔이 고운 빨래가 널려있다. 그 옆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맑은 표정이나, 형형색색 널려 있는 빨래나, 이 골목의 현실과는 달리 밝고 다채롭다. 기차 출입문에 짐짝처럼 매달려 있는 사람들의 하늘거리는 옷 역시 그들의 가난한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비참한 경제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이고 즐거운 사람들의 삶이 대조를 이루며 바삐 돌아간다.

김수자는 이렇게 세계 곳곳 사람들 삶을 담아내는 매개체로 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패션 사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이 트리엔날레는 딱히 패션이라기 보다는 또는 을 매개로 해서 현대인과 현대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진과 비디오 작품을 모은 전시다. 단지 패션이라는 용어로 묶었을 뿐이다.

유명 비엔날레들에 비하면 이 전시의 규모는 작다. 18개국의 작가 34명의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됐다. 하지만 유명 비엔날레나 국제전시들이 기성 작가와 북미·서유럽 작가 중심으로 가는 것에 비하면, 다양성에서는 오히려 이 트리엔날레가 더 국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디 셔먼, 스탠 더글러스, 김수자, 바바라 크루거 같은 기성 유명 작가들도 있지만, 마이칼렌 토마스, 토르스텐 브링크먼, 이토 바라다, 제레미 코스트처럼 새로운 작가들도 다수 소개됐다. 참여 작가 34명 중 백인남성은 4명뿐이고, 전체의 70%가 여성작가다. 전시는 내년 1 17일까지.

(서울아트가이드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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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트폴리 제공으로 '하이카다이렉트 웹진'에 연재되는 '왕초보와 이규현의 미술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백남준 ‘누워 있는 부처’(1994)

왕초보: 미디어아트나 디지털아트 같은 용어를 많이 들을 수 있는데, 대체 어떤 미술을 이렇게 부르는 거죠?

이규현: 미디어아트나 디지털아트나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미술에서 미디어라는 건 작품제작에 사용한 재료나 제작방법을 뜻하니까,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한 미술이라는 뜻에서 디지털 미디어아트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재료와 방식, 즉 뉴미디어로 제작하는 미술이기 때문에 뉴미디어 아트라고도 하지요.

왕초보: 그럼 뉴미디어 아트라면 그냥 새로운 미술이라는 뜻이겠네요?

이규현: 그렇지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뉴미디어 아트는 시대에 따라 바뀌지요. 옛날의 뉴미디어가 지금은 올드 미디어가 되는 것이니까요. 용어 얘기는 그만 하고, 뉴미디어 아트 얘기로 들어가보지요. 먼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시다. 당시엔 비디오가 최첨단 뉴미디어였어요. 하지만 그 걸 가지고 미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못했지요. 그 걸 처음 한 게 바로 백남준입니다. 1965년에 비디오가 언젠가는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지요.

백남준 ‘워치독’(1997)

왕초보: 백남준이 뉴미디어 아트를 시작한 작가라 유명한 것이군요.

이규현: , 백남준은 비디오를 포함한 모든 새로운 기술을 예술의 새로운 도구로 썼어요. 1984년에는 위성으로 서울, 뉴욕, 파리 현장을 동시 촬영해 한 화면에서 중계하는 작품을 했지요. 지금 생각할 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에는 첨단기술이었고, 무엇보다도 기술발달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의 발달이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전망 하지만, 백남준은 기술의 발달이 우리 삶을 얼마나 더 풍요롭게 해주는 가를 보여준, 긍정적인 사람이었어요. 머지 않아 기술이 예술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는 것을 예언했는데, 지금 정말 그의 말처럼 되었잖아요. 지금은 오히려 전통미술 제작방식보다 뉴미디어를 이용한 작품이 더 많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인천시에서 올해 8월에 인천국제 디지털아트 페스티벌을 개최하는데, 여기에서 총감독을 맡은 김형기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교수는 디지털아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작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제작방식에서 어떤 식으로든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왕초보: 그런데 뉴미디어 아트는 왠지 어려울 것 같은데, 왜 뉴미디어 아트를 그렇게 많이 하는 거죠? 뭐가 좋은 거죠?

이규현: 뉴미디어 아트는 어렵지 않아요. 만들기는 어려울 지 몰라도, 관객 입장에서는 더 재미있는 미술이에요. 왜냐하면 첨단기술을 사용하면 작가의 상상력을 작품으로 실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니까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이번 달에 뉴욕의 제임스 코핸 갤러리에서 백남준 개인전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누워 있는 부처(Reclining Buddha)’라는 작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비디오 스크린 위에 코믹한 표정의 불상이 누워 있고, 그 아래 스크린 두 개에서 여인의 나체가 두 동강 나 보여지고 있어요. 부처상과 비슷하게 누운 자세인데, 상체와 하체를 각기 다른 거리에서 찍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몸처럼 보여요. 그런데 실제로 이 작품을 보면, 여인이 몸을 이리 저리 돌리며 불편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두 동강이 난 누드가 더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가만 보고 있으면, 서로 전혀 조화로울 것 같지 않은 불상과 여인 누드가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에 웃음이 킥킥 납니다. 만일 이 작품에서 불상 아래에 비디오 스크린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정적인 이미지, 그림이나 사진이 있었다면 이만큼의 재미가 없었겠지요. 첨단기술 덕에 미술작품을 더 풍요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둘러서 강익중의 ‘삼라만상’이 설치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멀티플/다이얼로그∞’

왕초보: 하긴 일반인들도 디지털 기술 덕에 이미지를 자유롭게 요리할 수 있으니, 기술이 표현영역을 확장한 건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술은 뭐니 해도 작가의 손맛 아닌가요? 첨단기술로 하는 건 기계가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예술이 아니잖아요.

이규현: 하지만 뉴미디어 아트를 보면 작품 제작방식은 기계의 도움을 얻었을지언정, 작품은 여전히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또 하나 예를 들어보지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백남준의 대형 비디오조각 다다익선이 상설 전시돼 있는데, 올해 초에 작가 강익중이 다다익선을 빙 두르는 삼라만상이라는 작품을 설치했어요. 18m 높이의 백남준 대표작품을 감싸는 나선형 복도의 벽에 강익중 작가가 그림 6만점을 각종 오브제와 함께 붙인 것이지요. ‘멀티플/다이얼로그∞라는 제목의 이 전시에 가면 관객은 탑처럼 생긴 백남준의 다다익선주변을 돌면서 산을 올라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강익중 작가의 작품 곳곳에 음향이 설치돼 물, 바람, , 풍경 소리가 들리고, 작가의 어머니가 쓰던 풍금 어디에선가 그네라는 노래가 나옵니다. 관객이 벽에 걸린 그림을 그냥 보고 지나가는 수동적 관람을 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에 들어가서 소리도 듣고 걷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관람하게 되는 것이지요. 작품에서 산소리가 나게 하는 것은 기술이지만, 관객에게 이런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작가의 손맛이지요. 백남준의 대표작인 다다익선만 해도 그래요. 이 작품은 개천절을 상징하는 1003개의 비디오 모니터를 쌓아 만든 것인데, 높이 18m의 이런 조각이 그냥 돌이나 석고, 나무조각이었다고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육중하고 재미 없을지. 그런데 하나하나 스크린이 움직이는 비디오로 쌓여 있으니까, 이 탑 모양의 조각이 마치 살아서 떠들고 있는듯한 느낌이지요. 기술 덕에 더 인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에요.

 

미구엘 슈발리에 ‘프랙탈 플라워’(2008)

왕초보: 작가의 손맛을 전달하는데 기계가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군요.

이규현: , 아티스트들은 관객과 좀 더 가까이 호흡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첨단기술이 그 걸 해결해주는 거죠. 뉴미디어 아트는 관객과 직접 쌍방향 소통을 하기도 합니다. 이걸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라고 하는데요, 쉽게 말해 관객의 행동에 따라 작품 이미지가 변하는 것이지요. 저녁에 서울 청계천 광교 근처에 가면 프랑스 작가 미구엘 슈발리에의 프랙탈 플라워’(Fractal Flower, 2008)라는 작품을 볼 수 있어요. 청계천에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보도 쪽 옹벽에 디지털 꽃 이미지를 프로젝터로 쏘는데, 관객이 그 앞에서 움직이면 꽃이 활짝 피어나고 바람에 흔들리듯 바르르 떨리기도 합니다. 센서를 달아 놓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작품이야말로 첨단기술 덕에 가능한 것이지만, 작품을 그렇게 만든 작가의 마음은 너무 인간적이지 않나요? 관객과 함께 놀고 싶어하는 것이니까요.

 

왕초보: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이렇게 첨단 기술을 사용한 작품은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하죠?

이규현: 좋은 질문이에요. 뉴미디어 아트는 늘 그 게 문제가 됩니다. 실제 뉴미디어 아트를 가지고 하는 미술전시장에 가면 몇 작품은 꼭 고장 나서 작동이 안 되곤 하죠. 보통은 작가가 매뉴얼을 만들어 놓아 고칠 수 있게 해 놓아요. 그 작가의 작품을 손볼 수 있는 사람이 특별히 정해져 있기도 해요. 백남준의 경우가 그렇지요. 하지만 아무리 잘 해도 전통적인 미술에 비해 보존의 문제는 계속 불거지고, 그 건 뉴미디어아트가 계속 풀어가야 할 숙제예요. 그런 점 때문에 시장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방식의 미술작품이 더 인기가 있는 게 현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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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테이프만 있으면 모든 건물이 내 캔버스!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첨단 현대미술까지 다 있는 미국의 대표적 미술관인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Brooklyn Museum)에서 처음으로 한국 작가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선보였던 곽선경(Sun K. Kwak, 43)의 이 전시는 ‘280시간 껴안기(Enfolding 280 hours, 7 5일까지)’라고 이름 붙었다. 전시실에 작품을 설치하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280시간이기 때문이다.


한국 화가 첫 브루클린 미술관 입성 ... 테이프 찢어 붙여 ‘공간 드로잉’

전시실에 들어서면, 실제로는 280시간 보다 훨씬 더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실은 직사각형 모양의 넓은 방이 큰 기둥 네 개를 껴안고 있는 모양이다. 곽선경은 벽과 기둥에 매스킹 테이프(검은 종이 테이프)’ 5km 정도를 격렬하게 찢으며 이어 붙였다. 그래서 마치 거인이 큰 붓을 들고 텅 빈 전시실에 쓱 붓질을 하고 지나간 듯 하다.

하지만 거인이 붓질 한 번으로 쓱 그렸다고 생각 하기에 이 작품은 꽤 계산적이다. 벽에서 나온 붓 자국이 기둥으로 이어지면서 흐름을 만들고, 관객은 이 격렬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곽선경의 스튜디오는 뉴욕 맨하튼 124번가인 할렘에 있다. 지금은 할렘도 개발이 많이 되어 슬럼 이미지가 없어졌지만, 스튜디오를 찾아가며 그래도 조금은 무서웠다. 벽화가 가득 그려진 건물의 가파른 철제 계단을 붙들고 올라가니 좁고 어두운 복도 끝에 곽선경의 작업실이 있었다. 문을 여니 작업실 안은 환하고 넓다. 작업실 책상에는 크기와 색깔이 각기 다른 테이프가 높게 쌓여 있었다. 작가는 맨하튼 다운타운에 살면서 할렘의 이 스튜디오로 매일 출퇴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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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여기 오는 거 안 무서우세요? 왜 하필 할렘에 작업실을 얻으셨어요?

제가 보기보다 몸이 약해서, 작업실이 너무 멀리 있으면 힘이 들어서 일을 못해요. 맨하튼 안에서 싸게 구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여기로 오게 됐네요.”

내가 스튜디오에 가겠다고 했을 때 작가는 테이프만 몇 박스 있어서 볼 것도 없는데……” 라며 망설였다. 사실 스튜디오 자체는 이 작가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는 자연이 내 스튜디오라고 했는데, 곽선경에게는 미술관 건물 자체가 그의 스튜디오다. 전시실에 몸으로 직접 설치를 해야 비로소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곽선경 작가(원 안)가 작품을 설치하는 모습

-매스킹 테이프는 원래 뭐에 쓰는 물건인가요? 왜 그 걸 재료로 쓰시나요?
전 원래 페인팅을 전공했어요. 일반적으로 그림은 예쁜 액자에 둘러 싸여 벽에 걸려 있고, 사람들은 그 걸 몇 초 동안 보고 지나가지요. 하지만 그림과 관객, 작품 재료와 나 사이에 왠지 거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그 거리를 좁힐 방법이 뭘까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재료로 실험을 했어요. 철사도 써보고, 실도 써보고, 캔버스를 톱질해서 잘라 보기도 하고. 그래도 재료와 나의 사이를 좁힐 분명한 것을 찾지 못해서 늘 죽은 것을 그리는 답답한 느낌이었지요. 뭔가 험블(humble)하면서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어느 날 아침 문득 매스킹 테이프가 떠오른 거예요. 매스킹 테이프는 원래 작가들이 색칠을 깨끗하게 하려고 캔버스 위에 붙여서 칠한 뒤 떼어 내서 버리는 재료예요.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생활용품이고, 종이이면서 동시에 테이프라는 사실이 전 좋았어요. 바로 차이나 타운으로 달려가서 까만 매스킹 테이프를 왕창 사왔죠. 그 걸 가지고 당시 쓰던 스튜디오 건물의 비상구 계단 벽에 즉흥적으로 찢어 붙이기 시작했어요. 테이프로 하는 자유로운 드로잉이었어요. 미친 듯이 뜯어 붙이는데, 정말 너무 자유로운 것을 느꼈어요.”

-답답했던 게 확 해결되는 느낌 말인가요?

마치 손에서 잉크가 나오는 것처럼 자유로웠어요. 이거다, 나와 재료 사이의 거리가 없어졌다. 이렇게 자유롭게 그리면 되겠다, 너무 행복했어요. 뭔가 억눌린 것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게 바로 제 작업이에요.”

“손에서 마치 잉크가 나오는 느낌 ... 살아 움직이는 작품 만들고 싶어”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 설치됐던 작품 ‘Untying Space-Gwangju Biennale’.

검은 매스킹 테이프를 벽에 붙이는 것은 곽선경 작가 자신과 미술 재료 사이의 거리만 좁힌 게 아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관객과 미술작품의 사이를 좁혔다. 사람들은 전시실에 들어오면서부터 이 검은 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전시실을 몇 바퀴 걷고 나니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나라에 온 줄 알고 괴성 지르며 좋아하는 어린 아이도 있다. 곽선경은 관객들이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는 것, 특히 관객 각자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 전 그 게 너무 좋아요했다. 관객이 미술과 한 몸처럼 섞이는 순간이 바로 곽선경이 생각하는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관객이 벽을 따라 몸을 움직이면서 감상하는 모습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검은 옷을 즐겨 입으시는데, 매스킹 테이프 색깔이 검은 것과 관련이 있나요?

늘 검은 옷을 입는 건 아니고, 작품 설치할 때만 위아래로 다 까맣게 입어요. 내 스스로가 내 작업과 일치감을 느껴야 하니까요.”

매스킹 테이프에 매료된 뒤부터 곽선경은 미국 전역을 뒤져 전시 기회를 주거나 스튜디오를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을 찾아 지원했다. 선정 되면 여행가방에 테이프를 꽉 채워서 싼 항공 티켓이나 버스를 타고 전시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전시하는 그 장소가 곧 그의 스튜디오이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서초사옥 로비에 설치된 ‘생명의 힘(Life Force)’.

-작품이 장소특수적인 성격이 강할 수 밖에 없군요.
전시하는 장소의 의미와 특성이 제 작품에는 아주 중요해요. 가령 이 브루클린 미술관은 뉴욕의 다양한 인종, 다양한 계층이 와서 즐기는 곳이고, 고대 이집트유물부터 현대 서양미술까지 다양한 시기와 문화가 다 있는 곳이에요. 저는 그런 미술관의 미션에 동참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시실의 벽이 기둥을 껴안는 느낌으로 한 거고, 전시제목에도 껴안는다(enfolding)는 말을 넣은 거예요. 제 작품이 전시실 안에 있는 관객을 껴안도록.”

-수묵화 같은 느낌도 납니다.

, 서양과 다른 우리의 ()’이라는 개념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동양화가들이 굉장한 집중력을 가지고 군더더기 하나 없이 선 하나를 긋듯, 저 역시 집중해서 선을 붙여요. 제가 설치할 때 귀에 아이팟을 꽂고 하는데, 음악 듣는 게 목적이 아니라, 외부세계와 차단하는 게 주목적이에요.”

-작품을 계속 보고 있으면, 벽에서 선이 쏟아져 나와서 내가 휩쓸려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요? 그런 얘기 들으니 반가워요. 저는 살아 있는 전시를 하고 싶거든요. 박물관에 죽어 놓여있는 듯한 작품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관객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전시 공간은 다 달라지는 거잖아요. 그 게 살아 있는 게 아닐까 해요.”

-이 전시가 인기 있어서 관객과 대화 프로그램도 많은데, 관객들하고 얘기 나누는 건 재미 있으세요?

저는 관객들의 저마다 다른 느낌을 듣는 것을 좋아해요. 제가 관객에게 주려는 정해진 의도가 없기 때문에 관객이 스스로 어떻게 경험하는 지가 저한테는 중요하거든요.”

-설치할 때는 벽에 먼저 스케치를 한 뒤에 계획에 따라서 테이프를 붙이는 건가요?

꼭 그렇지는 않고, 선이 나갈 방향만 잡고 흐름과 속도를 즉흥적으로 조절하면서 붙여요. 어차피 추상화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제 작품을 설치, 또는 벽화라고 하지만 저는 공간 드로잉(Space Drawing)’ 또는 조각 드로잉(Sculptural Drawing)’ 이라고 하고 싶어요. 테이프를 쓸 뿐이지 드로잉과 다를 바 없어요. 2차원적인 납작한 테이프가 건축 구조물에 붙어 어디로든 뻗어갈 수 있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전시가 끝나면 이 테이프는 다 뜯어버리나요? 너무 아까울 거 같은데요.

처음엔 마음이 아팠지만, 오래된 얘기지요. 이젠 괜찮아요. 몇 번 전시를 거치면서 마음 비우는 연습을 하게 됐어요. 이 공간이 다 비워지면 전시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겠지만, 제 전시를 봤던 사람들에게는 기억이 남아있겠지요. 관객들은 더 이상 이 공간을 옛날 공간으로 보지 않고, 여기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한 기억을 가지고 있겠지요. 어찌 보면 그렇게 테이프가 뜯겨 버려지고 관객들에게 기억만 남기는 건,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가버리는 유한한 생명에 대한 얘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 곽 선 경 |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하는 곽선경의 개인전에 대해 뉴욕 현지 언론과 관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뉴욕에서 미술작가로 살아남는 것은 정말 힘겨운데, 곽선경은 비교적 빨리 무대에 들어서고 있다. “여기는 살아남지 않으면 죽는 곳이라는 점에서 도전적이고 짜릿하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한국에서 숙명여대를 졸업한 뒤 1993년에 뉴욕으로 와 NYU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뉴욕에 기반을 두고 작업을 하면서 미국, 유럽, 한국에서 꾸준히 소개됐다. 뉴욕 퀸스 미술관, 드로잉센터, 치 갤러리(CH’I Contemporary Art), 베를린 세계문화의 집, 광주비엔날레(2006) 등에 전시됐었다. 서울에서는 갤러리 스케이프, 브레인 팩토리 등에서 개인전을 했고, 삼성생명 서초타워 로비에 그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주간조선 2009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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